우리가 살고 있는 과학적인 세상이 비종교적인 것 같아도 우리 마음은 사실 이 시대의 화려한 각종 우상이 지배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 공장이다. 참 하나님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계속 대상만 바뀔 뿐이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과 우리가 사는 문화 속에 깃든 가짜들에게 결별을 선언하라. ‘하나님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면, 나머지 모든 삶의 좋은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그것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 당신 인생에 더없이 복이 되리라.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 내가 만든 신, 평생 소원이 있다. 오래 간절히 바랄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 내가 만든 신, 사랑이 있다. 사랑에 속고 환멸에 찬 노예가 된다. 내가 만든 신, 돈이 있다. 풍족한 소유와 소비로도 영혼의 헐벗음은 면치 못한다. 내가 만든 신, 성취가 있다. 그 어떤 성공신화도 인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내가 만든 신, 권력이 있다. 권력의지는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이다. 내가 만든 신, 종교가 있다. 은혜 없는 복음은 가짜 하나님을 만든다. ‘좋은 것’일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 당신에게 꼭 필요하고 좋은 것을 ‘하나님 자리’에 앉힐 때 끔찍한 악을 낳는 영적 중독이 시작된다.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을 차지하는 것,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걸 다른 데서 찾으려는 모든 시도, 그것이 바로 ‘당신이 만든 신’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의 가장 깊은 소원을 이루는 것이 곧 자신에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일일 수도 있음은 생각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왜 이삭을 수단으로 삼으셨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틀림없이 세상 무엇보다도 아들을 더 사랑했을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우상숭배이며, 모든 우상숭배는 해를 자초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거칠게 다루신 것은 오히려 자비였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선물이었지만 하나님을 첫자리에 모실 의향이 없다면 이삭과 함께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아들’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일이 없는 한 그는 자신의 사랑이 우상숭배로 변하고 있음을 알 길이 없었다. 당신도 아브라함처럼 그 산을 오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주님, 그것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는데 이제 주께서 저를 그것 없는 삶으로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만 계시다면 제게 정말 필요한 부와 건강과 사랑과 명예와 안전은 다 있는 것이며 결코 잃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으로 충분함을 알려면 우선 예수님밖에 남은 게 없어야 한다. 일단 내가 만든 가짜 신을 하나님 아래로 강등시키고 나면 그중 다수나 어쩌면 대부분이 우리 삶 속에 계속 남아 있어도 괜찮다. 이제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불안과 교만과 분노와 충동으로 괴롭히지 못한다. 니버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의존적 존재라는 무력감과 싸운다. 에덴동산의 첫 유혹도 하나님이 정해 주신 한계를 무시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운명에 대한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라는 것이었다. 이 유혹에 굴한 결과로 이제 그것이 우리 본성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유한성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의존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내 인생은 내 권한임을 악착같이 확인하려 든다. 하지만 이는 환상일 뿐이다. 우상이 우리 마음을 장악하면 결국은 성공과 실패와 행복과 슬픔의 정의가 몽땅 변질된다. 우상의 기준대로 현실이 재정의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긍휼은 누가 보기에도 선한 것이다. 그런데 우상 때문에 민족의 세력과 위상이 궁극적 선이 되면 거기에 방해되는 것은 당연히 다 악으로 변한다. 그분이 이스라엘의 적을 멸하지 않으신 것은 사랑이 많으셔서인데, 우상 때문에 요나에게는 그 사랑까지도 악한 것으로 보였다. 결국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는 게 우상 때문에 가능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