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부르심
책 속으로
1장. 개척한 코너스톤 교회를 떠나다
우리 거실에 열두 명만 모이더라도 혼란스러운 교회 상황에서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내가 동경했던 교회를 세울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는 일종의 자기 개발을 강조하는 헛소리를 들으려 함께 모이지 않을 것이고 성경의 절반을 무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성경이 주시는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교회들이 너무나 많았고, 이런 교회에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몰려가는 것을 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교회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을 때 실제로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회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성경적인 확신이 아니라 개인적인 선호가 동기로 작용할 때가 적지 않다.
2장. 교회의 신비에 눈뜨라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처럼 세상에서 더 위대한 명예는 없다.
자신이 만든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계정의 신으로 군림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에 스스로의 사당을 차리고 자신의 멋진 사진으로 도배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들과 정반대로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로 모여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을 필요했던 것이 조금이라도 부끄럽지 않은가?
3장.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주문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위한 ‘주문 내역’을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드는 오만을 저질렀다. 그분이 정확히 요청하신 대로 가져다드리기보다 너무나 많은 다른 것들의 영향을 받았다. 목회자들이 교회를 대중들이 접근하기에 더 편리한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일들은 효과 없었다. 키에르케고르는 교회에서 기독교를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대중적으로 만들고 불쾌감을 가능한 주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렇게 기독교에서 불쾌감을 주는 것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모두가 편안하고 재미있게 교회를 운영하고자 한다면 “교회 문을 닫아 버리라. 빠를수록 좋다. 아니면 하루 종일 열려 있는 놀이공원으로 바꾸어 버려라!”라고 말했다. 예배를 드리는 자들의 구미에 맞추려다 우리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 분에게는 무심하게 대함으로 인간 중심의 교회들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묵인하실 것이 무엇인지에 더 관심이 많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욕구나 전통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기보다 한 가지 단순한 질문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초대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은 그들이 마땅히 집중해야 할 일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은 일로 부산하지 않고 몇 가지 소수의 일에 집중적으로 힘썼다. 그런 노력이 세상을 바꾸었다. 현대 교회는 늘 새로운 일들을 끊임없이 도모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신 트렌드의 교회 성장론을 놓치지 않고 쫓아가려고 부단히 애쓴다. 어떤 프로그램을 추가하기만 하면 교회가 건강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결코 끝이 나지 않는 게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읽고 다른 사람들도 그 말씀을 읽도록 독려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체적으로 생명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말씀과 사랑과 기도와 성만찬에 전념하라고 명령하셨다.
4장. 갱단에서 배우는 교훈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유일한 일에 대해 일주일에 단 90분만 투자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갱단생활이 일주일에 한 시간의 모임으로 축소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경우에라도 일주일에 한 번 짧게 만나고 갱단 모임에 참석했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한 갱단이 다른 갱단에게 다가가서 “갱단 생활 어때? 이번 주에는 생활이 너무 바빠서 참석하지 못했네!”라고 말한다면, 그건 죽음이다.
함께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그리스도인 형제나 자매를 아무 이기심 없이 대하며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생명으로 인도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때가 있는가? 우리가 서로 사랑함이 실제로 사람들이 구원받는 결과로 이어진다. 서로 논쟁을 피하는 수준의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지 혹은 얼마의 노력이 필요하든지 상관없이 서로를 돌봐주는 하나 됨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한 가지 지침을 포기해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전략을 실행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강연과 프로그램과 행사를 계획하느라 분주하다.
교회의 요구가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면 언제든지 교회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 생활을 꾸려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고 예배를 흥미롭게 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느라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은혜와 용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 사람들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의 행위는 죄에 빠진 사람을 방관하는 거이 아니라 디모데전서 1장 20절에 나오는 바울의 모범을 따라 그들을 교회에서 출교시키는 것이다. 성경적 사랑은 무조건 죄를 덮어 주는 것이 아닌 확실한 회개로 이끌어야 이루어진다. 출교는 교회의 유익을 위한 조치이다.
5장. 종의 마음 vs 고객의 마음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대다수 사람은 섬기는 종의 마음이 아니라 고객의 마음으로 찾아온다. 짬을 내기 어려울 정도로 하루하루 바쁘게 살고 있어서 교회에서라도 편하게 쉬고 충족감을 누리기를 바란다. 교회 사역자가 당신의 필요를 채워 주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만큼 소비주의를 혐오하시는 분은 없다. 하나님은 주는 자가 가장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행 20:35). 서로 섬기는 꿈을 포기하지 말라.
교회는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의 가치를 판단해 왔다. 우리는 재능이 뛰어난 예술가들을 구한다. 세상에서 하는 그대로 평범하거나 가진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무시한다. 백만장자들, 기업인들, 유명인들은 늘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모두 자기 은사를 따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수준까지 섬길 수 있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기여할 수 있는 너무나 전문적이고 세련된 곳으로 교회를 만들지는 않았는가? 마이크 브린의 글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사람들을 모으는 일만 잘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실제로 사람들을 길러내는 일도 잘하고 있는가?”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나 연설가들이 있지만 아무도 그들을 진정으로 흠모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은 따를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존경한다. 대중을 유인하기 위해 찬양 콘서트와 재미있는 강사들이 필요하다면 그 교회는 허약하고 싸구려일 것이다. ‘교회’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로 사람들이 들어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곳을 실제 교회로 인정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읽기, 사랑, 기도, 성찬으로는 많은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뒤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들을 가미하기 시작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어떤 군대도 각자의 짐을 지고 가지 않는 군인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왜 섬기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여전히 용납하는가? 교인들에게 무임승차권을 나누어 주지 말라.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 자신들의 집과 차와 돈과 사생활과 건강과 휴가를 희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든지 들려줄 수 있다.
6장. 교회를 변화시키는 경건한 리더십
우리 대적은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버리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치중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한다. 소셜 미디어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행동을 그대로 복사할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중요하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섬기는 일을 우선시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중요한 우선순위로 삼도록 하신 것을 더 이상 긴요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후순위로 미루게 된다.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하는 설교자는 진리를 선포하기보다 되도록 비난을 듣지 않는 방향으로 말씀을 전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중요한 주제는 피하고 정치적으로 타협한다. 용기 있게 설교하는 목회자들을 찾기가 어렵다.
사역자들이 교인들의 기대를 총족시켜 주느라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정작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실행하기가 어려워진다.
당신은 예수를 따르는 대가를 계산해 보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단한 것이 확실한가?
평신도 리더들을 세우는 기준은 겸손과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으로 리더를 구할 때가 많다. 외모를 본다. 멋진 연설가와 재능이 뛰어난 리더를 원한다. 하나님은 항상 그분을 간절히 구하는 겸손한 사람을 으뜸으로 여기셨다. 겸손하게 잘 섬기는 사람들은 절대 유명해지지 않는다.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역할 수 있게 강도 높은 훈련을 해야 한다.
일반적인 차원의 사랑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랑을 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수십억 명의 영혼들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미 수십 번이나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쓸데없이 매달리며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사소한 문제로 싸우고 분열하기 쉽다.
우리는 고난 중에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낙심하고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
7장. 고난은 주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아이언 맨 트라이 애슬론(철인 3종 경기)을 보자고 하면 좋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구경이 아니고 직접 3.86km 수영을 하고, 180.25km 자전거를 타고, 42.20km 마라톤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똑바로 알고 있는가? 찬양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믿기 때문에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더라도 아무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고 배운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하는 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무서운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라고 경고하셨다.
당신의 교회가 세상의 부요와 형통함을 약속하는 선생이라면 빨리 도망쳐라.
성경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교회가 원래 지향해야 하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인도, 이란, 이라크 등의 전 세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고난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포기할 줄 모르는 교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상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충격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 치우쳐 하나님의 생각을 무시해 버렸다. 사람들의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려고 노력하다가 종종 진리를 망각해 버릴 때가 있다. 예수님 외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행되는 악한 행위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말과 가르침이 철저히 반문화적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우리 시대의 문화는 예수님 당대의 문화 못지않게 추악하며 사실상 그때보다 추악하다. 교회의 가르침은 세상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를 때 고난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영원을 바라볼 때 우리는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 고난의 동기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 기꺼이 고난당하고자 하는 태도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이고 복음 중심적이다. 고난 중에 기뻐하도록 서로 격려하자.
8장. 야생의 신앙을 회복하라
동물원처럼 보이는 교회들이 너무나 많다. 동물원이라는 환경에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덧 그 환경에 길들여지고 야생에서는 쓸모없이 되고 말았다. 교인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부응하고 편안하게 해줄 예수님과 교회를 원한다. 앨런 허쉬는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교회라는 제도 자체를 유지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삼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희생자 사고방식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자녀들을 보호하고 길들이려고 하기보다 주님께 받은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홈스쿨링, 대안학교, 사립학교가 안전하다는 편견을 버려라. 하나님은 공립학교에서도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을 사용하신다. 세상과 접촉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교실에서 공개적으로 진리를 대변하고 진화론과 싸우도록 강하게 양육해야 한다.
예수님은 안락한 교실과 강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지 않았다. 평신도를 가정, 직장, 지역사회 선교사로 파송해야 한다. 벙커에 함께 숨기보다 두려움 없이 그분의 복음을 들고 세상 끝까지 가야 한다.
9장.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회
교회를 시작할 때 남들을 따라하지 말라. 가능하면 대형 교회를 짓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고가 만연해 있다. 교회 조직이 소수의 음악가들만이 중요하다는 듯한 암시를 풍기면 이단적 조직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없이 바쁘게 진행되는 교회 행사는 온 집안에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를 쌓아 두고 사는, 숨이 막히는 공간과 같다.
불필요한 소유를 줄일 때 더 풍성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성경책과 잔 하나와 약간의 빵을 손에 든 사람들만 남을 때까지 교회가 정화된다고 생각해 보라. 단순한 교회에서 하나님과 더 내밀한 관계를 누리며 더욱 온전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 교회의 수준을 개선시킬 목적으로 추가한 프로그램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몰아내는 결과를 낳았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기대가 실제로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할 흥미로운 요소들로 집회를 채우고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하실 여지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지루하고 따분할 뿐인 예배를 감수해야 한다. 함께 며칠 동안 기도하기 위해서는 믿음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얻는 놀라운 경험은 충분히 어떤 어려움도 감내할 가치가 있다.
이웃과 동료들과 꾸준히 복음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끝까지 집중해야 한다. 가정 교회들은 선교적 교회보다 이기적이 될 위험성이 훨씬 더 크다. 자연스럽게 편안함에 안주하게 된다.
우리는 성도들이 예수님께 온전히 사로잡히기를 원한다.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매일 말씀으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교인들은 동일한 성경 읽기표를 사용해서 성경을 읽고 있으며 이렇게 해서 매일 말씀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방식의 예배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잡지 표지에 등장한 두 ‘대형 교회’를 계속 강조하면서 마치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시늉만 할지 모른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무엇이 ‘효과가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집중적인 기도를 대신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병상을 지키면서 중병을 앓는 교회를 보며 가슴을 치고 교회의 회복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후기. 오만에 굴복하지 말라
분열을 용납하지 말라. 분열을 초래하는 사람들을 단호히 꾸짖고 교회에서 내보낼 정도로 과감하게 대처해야 교회는 건강해진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 스스로를 모든 이야기의 희생자로 만드는 데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 그들은 전문적인 희생자들이며 그 원인은 보통 교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게 한 장본인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위로만이 우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을 근심하게 한 것이 옳았다고 설명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며 그들을 근심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교만한 사람들에게 생각을 빼앗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례를 저질렀거나 불쾌하게 했던 사례들을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뇌된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늘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를 드리는 데 집중한다.